중요한 메시지 찾고도 식별 못해
강력한 적용까지 흘러 나왔을 것
설교, 설명 아니라 메시지 전해야
본문 연구하고 의미도 찾아낸 뒤
가치 식별하고 묵상까지 꿰어야
그런 메시지 갖고 강단 올라가길

예배당 채플 의자 교회 자리 예배 목사 마이크 집회
▲한 교회 예배당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이번 시간에는 설교 메시지에 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본문에서 메시지를 찾아내고 뽑아내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핵심 메시지를 찾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가치를 식별하고 찾아내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메시지 도출에 대해선 아무래도 예를 들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몇 해 전 같은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던 강도사님이 수요예배 시간에 설교를 하셨습니다. 참고로 강도사님은 평소 충실하게 설교를 준비하시고 차분하게 잘 전하시는 분입니다.

그날 선택한 본문은 사사기 3장 31절 한 말씀이었습니다. 일단 한 절을 설교 본문으로 선택하셨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냈습니다. 한 절 본문에서 메시지를 찾아내고 뽑아내려면, 기본적으로 깊고 넓은 연구가 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사기 3장 31절 말씀을 보아야겠지요.

“에훗 다음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가 되었다.
그는 소를 모는 막대기만으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쳐 죽여 이스라엘을 구하였다(새번역).”

사사 ‘삼갈’ 이야기입니다. 강도사님은 삼갈의 아버지 이름이 ‘아낫’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설교 당시 아낫은 정통 유대인 계열의 이름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했습니다(충분한 연구가 있었다는 점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낫이 정통 유대인 계열이 아니라는 말은 삼갈 역시 정통 유대인, 성골 유대인으로 볼 수 없다는 점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설명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로 환원하자면 ‘금수저-흙수저’ 정도로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삼갈이 사용했던 무기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삼갈이 사용한 무기는 ‘소 모는 막대기’입니다. 소 모는 막대기는 전쟁 무기가 아닙니다. 물론 맹수로부터 소를 지킬 때 필요에 따라 무기로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짐승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무기이지 전장에서 사람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무기가 아니라는 것을 간과하지 않고 설명했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강함도 설명했습니다. 지도를 곁들여 블레셋 지역이 얼마나 비옥한 지역이었는지 설명했습니다. 고고학 발굴과 조사로 블레셋 사람 수가 18만 명 가량 된다는 사실도 설명했습니다. 장정만 60만이 넘었던 유대인의 전체 인구에 비하면 100대 1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도 설명했습니다.

절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철로 만든 병거와 철로 만든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놓치지 않고 설명했습니다. 그 와중에 삼갈이 소 모는 막대기로 한 개 대대 병력이 넘는 군인을 쳐 죽였다는 점을 설명했습니다.

제가 드린 말씀 중 가장 많이 반복한 단어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설명’입니다. 강도사님께서는 설교 시간에 많은 것을 설명했습니다. 일종의 강의처럼 많은 정보를 찾아내고 그것을 잘 설명하면서 전달해 주었습니다. 내용 자체가 신선하고 몰랐던 부분이었기 때문에, 집중하며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내용을 길게 설명하는 것으로 아쉽게 설교를 마무리했다는 점입니다. 수요예배는 전통적으로 기도회로 불리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설교 시간이 확보된 예배입니다. 아쉽게도 설교가 아니라 강의처럼 느껴졌습니다.

너무 아쉬웠던 것은 저 짧은 한 절에서 너무나 중요한 메시지를 찾아놓고도 메시지를 전혀 식별하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메시지를 찾아놓고도, 그것이 메시지인 줄 모르고 흘려버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할 수 있습니다. 아니 질문해야 합니다. 강도사님이 설교를 위해 공부하고,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찾아낸 이야기를 가지고 정작 들려주어야 할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삼갈을 사용하신 하나님, 연약한 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 나와 같은 사람조차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설교하면 어땠을까요? 그것을 핵심 메시지로 삼았다면 참고 구절로 삼을 수 있는 본문과 연결시킬 수 있고, 여러 본문이 서로 엮이면서 더 큰 울림을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고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 1:27, 우리말성경).”

세상의 어리석고 연약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롭고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을 설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고스란히 예수님께로 연결됩니다. 이사야 53장에 있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사 53:2-3)”.

사사기 한 절을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찾아낸 가치를 알아보았다면, 찾아낸 메시지를 토대로 ‘소 모는 막대기를 사용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손에 붙들린 소 모는 막대기, 지존 고수의 손에 들린 천 조각’과 같은 메시지를 담아낸 제목을 정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성도들에게 기대감을 주고,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무엇보다 연약하고 흠모할 것 하나 없었던 예수라는 인물을 통해 죄를 멸하신 하나님을 이야기한다면, 나와 같이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까지도 얼마든지 사용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로 시선을 이끌고 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랬다면 참으로 아름답고도 힘 있는 설교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만약 메시지를 이렇게 이끌어 갔다면, 강력한 적용도 흘러나왔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약해졌습니다. 힘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만약 작은 개척교회나 시골교회라면 성골도 아니고 진골도 아니며, 들고 싸울 수 있는 무기마저 초라하기 짝이 없다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성골도 진골도 아닌 주변인이었던 삼갈을 쓰시는 하나님, 최신식 무기와 같은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소 모는 막대기와 같은 사람이라도 하나님 손에 붙들리면 세상을 부끄럽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와 적용을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설교는 설명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하고 나누고 가르치고 선포하는 시간입니다. 설교는 본문을 충실하고 연구하고 묵상한 후 메시지를 찾아내고 도출해서, 청중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청중의 가슴에 들리는 언어로 전달하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본문 연구에 충실해야 합니다. 본문을 연구하고 공부하고 묵상해서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야 합니다. 찾아낸 의미가 가진 가치를 식별하고 그 가치를 따라 연구하고 공부하고 묵상한 것을 한 줄로 꿰어내야 합니다(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물이 되니까요). 그렇게 메시지를 만들어서 강단에 올라가면 좋겠습니다.

지혁철 목사

잇는교회 개척
<설교자는 누구인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