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바와 바울, 비슷한 삶의 길
유대 전통-헬라 문화 모두 정통
예루살렘 넘어 안디옥까지 인연
바나바, 다소에서 바울 데려와
협력해 복음 사역 결과도 대성공
‘권고의 아들’ 별명답게 큰 그릇

바나바 바울
▲설교하는 바나바를 그린 그림.
5. 2차 놀람: 바울에게 ‘동역의 손’을 내민 바나바

바나바가 이렇게 바울에게 사도로 인정하는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가 이미 전부터 바울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 따르면 바나바는 바울과 가말리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자로 바리새 힐렐학파 동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개연성은 있어 보입니다. 이런 친분관계 때문에 바나바는 개인적으로 강직하고 거짓이 없는 바울이 회심한 것을 쉽게 알 수 있었고, 안디옥에도 초청해 함께 동역자로서 복음 사역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바나바는 유대 전통은 물론 헬라 문화에도 정통한 바울과 비슷한 삶의 길을 걸어왔을지 모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바나바는 구부로 섬 출신이고,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지만 바울보다 상당히 일찍 복음을 받아들였으리라는 점입니다. 왜나하면 바나바는 이미 예루살렘 교회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가 사촌(혹은 조카)이라는 점에서 볼 때 마가의 어머니를 통해 복음을 전수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승천 이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내리기까지 120명이 함께 모여 기도하기에 힘쓴 것을 볼 때, 마가의 집안은 부유하기도 했을 것이지만 동시에 믿음도 뛰어났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마가 집안의 중심에는 마가 어머니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바나바는 물론 마가도 어머니 덕분에 일찍 복음의 길에 들어섰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 맺어진 바나바와 바울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안디옥으로 연결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얼마 안 되는 짧은 기간(15일; 갈 1:18) 동안에도 복음 증거를 멈추지 않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과 더불어 복음에 대해 논쟁을 벌이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이들에게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살인 충동을 느끼도록 만듭니다. 이는 아마 뜨거운 열심은 있었지만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바울의 경직된 태도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바나바는 상황에 맞추어 복음을 적절하게 전파했지만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의 보석에 불과했음이 분명합니다.

바울의 열심이 그의 혈기와 함께 뒤섞여 많은 새로운 입교자들도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많은 반대자들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이 결과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죽음의 협박을 받게 되고, 따라서 주변 사람들의 충고에 따라 할 수 없이 가이사랴 항구에서 배를 타고 고향인 다소로 향하게 됩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바나바는 바울이라는 인물에 대해 확실한 맏음을 갖게 됐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복음 전파의 다음 단계인 이방 선교에 환상의 동역자로 다시 만나게 됩니다.

바울이 다소에서 얼마나 머물렀는지, 또 거기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선 학자들마다 다른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소에 머물렀던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다소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향인 다소로 돌아간 바울을 기나긴 기록 부재의 암흑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만든 것은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안디옥
▲안디옥 시내 개신교회. 프랑스 옛 영사관이 교회로 탈바꿈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당한 후 헬라파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더 이상 안전하게 거주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헬라파 기독교인들이 “거룩한 곳(즉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즉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헐고 또 모세가 준 율법을 폐하겠다”고 주장한 것으로 유대교인들이 오해를 하였기 때문입니다(행 6:13-14).

물론 당시에는 유대파 기독교인들은 할례와 같은 모세 율법을 지키고 성전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아직 유대교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고 따라서 박해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헬라파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유대 지방을 떠나야 했으며, 인근 지역으로 가서 새로운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은 시리아 지역 중심 도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지중해 해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많은 인구를 가진 안디옥은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대도시였으며, 그런 만큼 안디옥 교회도 나날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많은 이방인들이 넘쳐나게 된 만큼, 시급하게 교회를 좀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능력있는 교역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필요에 따라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 선택된 자가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도덕적으로 흠이 없을 뿐 아니라 설교 능력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행 11:24).
바나바는 분명히 안디옥 교회 책임자로 최적이었으며, 바나바가 부임한 후 안디옥 교회는 더욱 더 부흥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넘쳐나는 인원을 혼자서 다 감당할 수 없었던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바울을 기억하고 직접 다소까지 방문해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려 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나바의 인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아랫 사람들을 보내 바울을 부르는 대신 본인이 직접 다소까지 방문해 바울을 안디옥으로 초빙했던 것입니다.

바나바의 이러한 행동은 그의 그릇 크기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권고의 아들’이라는 별명은 설교만 잘 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는 대상을 나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바울은 아마 바나바의 이러한 겸손한 태도에 감명을 받아 안디옥에 오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협력해 복음 사역을 한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이후 안디옥 교회는 크게 번창했는데, 얼마나 많은 숫자가 모였는지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인(Christians)’이라는 명칭으로 불릴 정도였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이 호칭이 안디옥에서 사용된 것을 보면, 이 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는지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 바울
▲루스드라에서 신으로 섬김을 받는 바나바와 바울을 표현한 그림.
안디옥 교회, 새로운 비전 품어
교회로 찾아오길 기다리기보다
구석구석 이방인 찾아 나서기로
바나바, 바울과 함께 전도 떠나
사도행전 13장부터 바울이 중심
바나바, 복음 온전히 이해 못해

6. 3차 놀람: 바울과 떠난 제1차 전도여행

바나바의 놀라운 인품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일시적으로 남을 위해 헌신할 수도 있지만, 그런 헌신이 오래도록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바나바의 겸손한 자세는 기적에서 기적을 연이어 만들어 내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정도로 교인들 숫자가 확장되자, 바나바가 주도하는 안디옥 교회는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됐습니다. 즉 이방인들이 복음에 대해 굉장히 긍정적일 뿐 아니라 적극적임을 깨닫게 되자, 이제 교회에 앉아 이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구석구석 이들을 찾아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물론 이에는 많은 위험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당시는 교통 상황이 좋지 않았고, 의식주나 자연재해의 문제도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들이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율법을 지키려는 유대인들의 반발이 극심했고, 심지어 크나큰 생명의 위협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바울의 고백에서도 잘 드러납니다(고후 11:23-27; 갈 6:17).

이런 상황에서 바나바는 바울과 다른 사람들을 파견 형식으로 보내고 자신은 안디옥 교회 총책임자로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힘들고도 힘든 전도여행을 마다하지 않고 바울과 함께 떠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바나바가 흠을 찾아보기 힘든 신실한 그리스도의 종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함께 바나바를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라고 표현한 것이 이를 잘 증명해 줍니다(행 15:26).

바나바가 주도한 제1차 전도여행에서 우리는 바울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어느 시점에서부터 바나바 중심에서 바울 중심으로 바뀝니다. 즉 사도행전 13장 9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면서, ‘바나바와 사울’ 혹은 ‘바나바와 무리들’이 ‘바울과 바나바’ 혹은 ‘바울과 무리들’로 바뀝니다.

이는 바울이 선교 여행을 하는 무리의 중심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마 전도여행이 진행되면서 감춰져 있던 복음에 대한 바울의 정확한 이해가 드러나고, 따라서 복음 전도는 바울을 중심으로 진행됐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상대적으로 바나바의 율법에 대한 집착 내지 몰이해를 의미하는데, 안디옥에서 있었던 사건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 예루살렘 할례주의자들이 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식탁을 떠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안디옥
▲안디옥 베드로 동굴교회 입구.
그러자 베드로를 따라 바나바를 포함한 다른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의 식사를 멈추었습니다(갈 2:12-13). 이때 바울은 베드로를 대표로 꾸짖었지만 바나바도 이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이 사건은 바나바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바울처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제1·2·3차 전도여행시 ‘가는 곳마다 회당을 먼저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패턴’을 볼 때 바나바의 설교는 아무래도 바울의 것과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바울은 그 불같은 성격으로 인해 이를 지켜보지 못하고 본인이 나서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설교에 대한 선호가 분명하게 갈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회당에서 쫓아내고, 심지어 박해를 가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헬라인들은 오히려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바울을 적극적으로 따랐던 것입니다. 회당에서 쫓겨난 바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헬라인들을 데리고 다른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세운 이 헬라인 이방 교회가 나중에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A.D. 66-70년) 이후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사도들과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부터 안전했던 이방인 교회들은 날로 부흥해서 바울의 명성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를 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이런 바나바와 바울을 보고 각각 신들의 왕인 제우스와 제우스의 대변인인 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 바나바는 제우스처럼 풍채가 좋았고, 바울은 헤르메스처럼 왜소하고 볼 품이 없었습니다. 거기다 복음 증거는 바울이 도맡아 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의 눈에는 바나바와 바울의 관게가 제우스와 헤르메스의 관계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비록 전도여행의 주도권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명확히 이해했던 바울에게로 넘어갔지만, 바나바는 끝까지 바울과의 동역자 관계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바울과 바나바가 의기투합해 이뤄진 전도여행은 성공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처음 시도하는 전도여행이었지만, 바나바의 인품과 바울의 지식은 서로 잘 조화를 이루어 전례가 없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내었던 것입니다.

구약 문화 배경사 류관석
▲류관석 교수.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